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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시승기

바퀴 달린 방 닛산 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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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종훈 작성일11-08-27 19:52 조회9,0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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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빠르게. 자동차를 지배하는 명제다. 자동차의 역사를 관통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1초라도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디자인을 개발하고, 새 기술을 찾아 돈을 쏟아 붓는다. 더 빠른 차, 더 강한 차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자동차 메이커들의 지상과제다. 그래서 그들은 새 차가 나올 때마다 얼마나 더 힘이 세졌고, 빨리 달릴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이런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빨리 달리는 건 관심 없다’는 차가 있다. 천천히 달릴 때 가장 아름답고, ‘움직이는 방’이라는 컨셉트를 적용해 느림의 미학을 얘기하는 차, 닛산 큐브다. 큐브가 외치는 ‘느림의 미학’은 발상의 전환이자, 자동차에 대한 도발이다. 우리는 왜 ‘속도와 성능’에 집착하는지 되물어보게 하는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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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헤이리의 한 주차장에서 만난 큐브가 묻고 있었다. “왜 그렇게 빨리 달리려고 하는가?”

어찌보면 장난스럽고 성의 없는 디자인이다. 엔진이 들어간 작은 상자, 사람이 들어가는 큰 상자, 두 개의 상자를 붙여 만든 2박스 스타일의 디자인. 그래서 이름도 큐브다. 디자인의 기본이라는 에어로다이내믹은 안중에도 없고 우리가 봐 왔던 자동차라는 개념을 깡끄리 무시한 디자인이다. 유치원 아이들의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디자인. 이 정도 디자인은 나도 하겠다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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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적 상상력이 그려낸 차다. 이 차의 디자인 개발을 주도한 이가 만화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동차 회사에 들어오기 전까지 자동차는 전혀 모른 채 만화에 푹 빠져 살았다는 이다. 차를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역설의 디자인이다.

차를 설명하는 언어도 기존의 자동차 언어와는 딴판이다. ‘선글라스를 쓴 불독’ ‘제니퍼 로페즈의 엉덩이’ 같은 식이다. 가장 압권은 ‘비대칭 디자인’이다. 운전석 대각선의 C 필러를 창으로 덮어버리는 것. 뒤에서 보면 C필러가 한쪽만 보인다. 좌우 대칭이어야 한다는 디자인 원칙을 과감히 파괴한 것. 트렁크 도어가 열리는 방향도 핸들 방향에 따라 다르다. 좌측 핸들을 적용한 한국에선 트렁크 도어가 왼쪽으로 열린다. 좌우를 바꾸는 게 생각보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과거 미쓰비시 파제로를 들여온 현대 갤로퍼는 핸들만 좌우를 바꾸고 트렁크 도어는 일본식 그대로 만들어 한국 도로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금형비용을 아끼기 위해 비난을 감수한 것이었다.

닛산은 이런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귀찮고 복잡하고 돈이 좀 들어도 현지 시장에 맞게 좌우를 다시 바꿔 차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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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칭 디자인은 묘한 매력을 풍긴다. 긴 머리를 묶어 오른쪽 어깨로 넘긴 여인의 뒤태를 닮았다. 하지만 비대칭 디자인은 착시이자 미완이다. C 필러의 한쪽을 차창과 같은 블랙 컬러로 만들어 마치 통유리로 만든 것처럼 보이게 할 뿐 C 필러는 엄연히 존재한다. 밖에서 보면 좌측과 뒷유리가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운전석에서 고객들 돌려 뒤를 보면 엄연히 C 필러가 있어 시야를 가로막는다. 막힌 시야를 뚫어야 비대칭 디자인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 하지만 불가능하다. C 필러를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도는 참신하고 놀랍다. 현대 벨로스터의 ‘비대칭’은 어쩌면 큐브에서 힌트를 얻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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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비대칭’ 디자인이 아니다. 바로 그런 디자인을 "OK"하고 받아들여 양산까지 이르는 닛산의 조직문화다. 자동차를 잘 모르는 철없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 스케치에 불과했을 디자인을 과감히 채택하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모험이었을지 모른다. 일본을 대표하는 슈퍼카 GT-R을 만드는 닛산이 아닌가. 그런 닛산이 ‘슬로 디자인’을 표방하는 큐브를 만드는 모험을 과감히 시도했다는 점에서 닛산의 저력을 본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소프트한 마인드, 색다른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열린 조직은 다양한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동력이 된다. 아마도 르노와의 합병이 가져온 닛산의 체질변화가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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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큐브를 두 번 시승했었기 때문에 3세대 큐브에 대한 기대는 사실 크지 않았다. ‘느림의 미학’을 내세우는 건 결국 ‘잘 달리지 못한다는 고백’ 쯤으로 이해했다. 결국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려는 수사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동을 걸고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달리는 성능 면에서도 만만하게 볼 차가 아님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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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바깥과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제한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박스스타일이다. 머리 윗 공간은 과도할 정도로 넓다. 뒷좌석도 여유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뒷좌석은 최대 150mm 슬라이딩 할 수 있다. 

자동차 시트가 아니라 의자에 앉은 자세가 나온다. 편하다. 각종 계기판은 간단하게 정리됐다.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버튼과 계기류들이 심플하게 배치됐다. 내비게이션, 16인치 알루미늄 휠, 오토에어컨 조합의 1.8SL과 15인치 스틸휠, 수동에어컨 등이 조합된 1.8S로 모델이 구분된다. 고급형인 1.8 SL이 시승차로 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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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럽지 않다. 부담 없는 재질이 인테리어를 구성하고 있다. 마무리는 야무지다. 지붕 끝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붕과 앞창이 맞닿는 부분이 꽉 물려있다. 시야는 최상이다. 네모난 차창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프레임 안에 들어온 사진 같다. 비대칭 디자인이 착시였음은 실내에서 알 수 있다. 바깥에선 드러나지 않은 운전석 대각선 방향의 C 필러가 실내에선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시야를 막는다. 

여기 저기 자잘한 수납공간이 숨어있다. 리어게이트에 포켓이 있고, C 필러 안쪽에도 소품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노트북이나 카메라 등 조금 큰 물건은 조수석 글러브 박스에 넣어두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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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어링 휠에는 크루즈컨트롤 버튼도 있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 편한 장치다. 크루즈컨트롤 걸어두고 여유 있게 창 밖 풍경을 즐기며 달리는 데 잘 어울리는 차다.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무단변속기 때문만은 아니다. 타이어의 구름, 엔진의 힘, 변속, 차체의 움직임 등이 2세대 큐브에 비해 훨씬 더 부드러웠다. 디자인이 워낙 강해 성능이 무시되는 듯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첫 발 떼는 순간 느낄 수 있다. 

핸들은 3바퀴를 조금 더 돌아 3.4회전한다. 조향비가 큰 편이다. 조금 느슨하다고 할까. 조향반응은 정직하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핸들 조작에 운전자가 원하는 만큼 반응한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다. 가속페달의 킥다운 버튼은 없다. 그냥 아무 저항 없이 바닥까지 밟힌다. 가속을 시도하면 엔진 소리가 먼저 커지고 차체는 한 박자 쉬고 반응한다. 소리가 앞서서 차를 끌고 간다. 그리 시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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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판매되는 큐브에는 1.8 엔진이 적용된다. 일본에선 이보다 배기량이 적은 1.5 리터 엔진이 올라간다. 직렬 4기통 DOHC 1.8엔진의 최고출력은 120마력. 최대토크는 16.8kgm로 공인연비는 14.6km/L다.

차의 체격을 볼 때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바람소리와 차체의 안정감, 즉 롤링과 피칭이다. 차 높이가 1,690mm로 제법 커서다. 하지만 기우였다. 바람소리는 고속주행 할 때나 실내로 파고들 뿐 시속 100km 전후에서는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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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흔들림도 마찬가지다. 휠베이스가 2,530mm로 차 길이에 비해 넓다. 리어오버행은 거의 없을 정도로 타이어가 뒤로 바짝 붙었고 프런트 오버행도 그리 길지 않다. 넓은 휠베이스가 차체의 안정감을 확보해주는 것. 토션 빔 액슬을 적용한 리어서스펜션은 일체형임에도 차체를 안정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코너에서 의도적으로 가속을 하며 핸들을 심하게 조작했다. 차가 기우는 느낌이 생각보다는 심하지 않았다.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정도의 안정감이다. 

실린더의 내경보다 행정이 짧은 쇼트 스트로크 방식을 채택했다. 쇼트 스트로크 엔진은 강한 펀치력을 바탕으로 스포츠카에 어울리는 방식. 속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큐브도 이 방식을 택했다.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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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이 자랑하는 X 트로닉 무단변속기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변속을 보여줬다. 일자형 변속레버에는 오버 드라이브 버튼이 있다. 경제운전을 할 땐 오버드라이브를 작동시키고, 가속할 땐 해제시키면 훨씬 효과적으로 차를 다룰 수 있다. 

시속 100km에서 오버드라이브를 작동시키면 2,000 rpm을 유지하고 오버드라이브를 해제하면 4,000rpm 부근까지 치솟으며 힘을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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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슬로 디자인 운운 하는 말에 차의 성능은 별로일 거라고 서둘러 단정 지어선 안된다. 150km/h 이상의 고속에서는 가속감도 떨어지고, 공기의 저항도 만만치 않지만 그 이하의 속도에서라면 동급 세단에 견줘 결코 떨어지는 성능이 아니다. 느림의 미학은 말 뿐이다. 빨리 달리려면 충분히 빨리 달릴 수 있는 차다.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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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에어백, 임팩트 바가 내장된 도어, VDC, ABS, TCS, EBD, 브레이크 어시스트, 액티브 헤드 리스트레인트 등의 안전장비를 갖춰 탑승객을 최대한 안전하게 보호한다.

큐브를 탈 때에는 느림의 미학을 즐겨볼 필요도 있다. 차창을 열고 성큼 다가온 가을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달리면 빨리 달릴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만나게 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 길가의 가로수, 서둘러 피어난 코스모스, 그리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늘씬한 미녀의 뒤태 등등. 선글래스 쓴 불독 등에 앉았다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불독 마냥,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때로 뒷차의 하이빔 세례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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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 개발을 총괄했던 치아키 수미 닛산자동차 상품개발총괄 이사는 “타이어를 붙인 방”이라고 큐브를 설명했다. 자동차가 아니라 방의 개념으로 만든 차라는 것. 그는 또, “천천히 달리는 게 어울리는 차”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의 말 대로 큐브는 움직이는 방이었고 천천히 달릴 때 가장 좋았다. 

불독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가격은 착하다. 수입차 시장에서 이보다 싼 차는 없다. 1.8S가 2190만원, 1.8 SL은 2,490만원이다. 국산 준중형차와 비슷한 가격이다. 

독특한 스타일링에 많은 이야기 거리를 담고 있고, 가격까지 착한 이 차가 안 팔린다면 이상한 일이다. 한국닛산은 벌써 1,600대나 주문을 받아놓고 있다. 대박인 셈이다. 장난기 어린 불독이 한국에서 어떤 신화를 써내려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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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훈의 단도직입

오버드라이브가 달린 일자형 변속레버는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수동변속기능을 겸한 팁트로닉에 익숙한 한국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다. 1.8 S에 올라가는 15인치 휠은 무겁고 충격흡수와 진동 면에서 불리한 스틸휠이다. 아쉬운 대목이다.